웃는 남자
갈림길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서 있을 때였다. 디디는 여전히 머리의 무게를 팔로 지탱하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호박이...... 이윽고 금속조각으로 가득찬 자루가 바로 귀 곁에서 터진 것처럼 요란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런데 이것은 상당히 왜곡된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니까. 아주 짧지만...... 돌이키고 돌이키기를 거듭하는 동안 몇 개의 겹으로 늘어나버린 그 순간, 최초의 충격이 있었을 때...... 구 인승 승합차와의 충돌로...... 작은 유릿조각들과 빗물, 차가운 빗물이 바늘처럼 얼굴로 튀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다른 차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버스가 크게 회전했을 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있는 힘껏 붙들었지. 그 짧은 순간...... 나는 디디가 아니고 가방을 붙들었지.
가방을.
여기 그것이 있다.
내 무릎 위에.
평범한 가방이다. 내가 오랫동안 사용한 가방. 오래 사용해 부드럽게 단련된 가죽끈이 달린 배낭. 주머니처럼 불룩하게 채울 수 있는 형태로 위쪽을 끈으로조일 수 있고 바닥엔 방수천을 덧댔고 기분좋은 소리를 내며 잠기는 버클이 달린 내 낡은 가방. 여기 무엇이 들었나. 몇 번이고 뒤집어봤으므로 가방을 열지 않고도 안에 든 것을 나는 다 말할 수 있다. 충전기, 열쇠, 백오십만원쯤의 잔고가 찍혀 있는 통장, 인감으로 사용했던 도장, 피부염 연고, 포장지에 들러붙은 껌, 수십 번 손을 문질러 닦아 변색된 손수건, 색연필로 낙서가 되어 있는 영화 티켓, 복권 한 장, 조그만 봉투에 담긴 방습제, 동전들, 메모들, 언제나 내가 사용했던 용품들, 나의 일상들, 잡동사니들, 이것뿐이다. 내가 움켜쥔 것. 그래서 지금 내 손에 남은 것.
이것뿐이다.
이것을 이해해보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나는 여기 머물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
단순해지지 않는다.
황정은, <웃는 남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