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그리고 농민 백남기
11월 새문안지 기고글.
존엄, 그리고 농민 백남기
지난 달 농민 백남기가 끝내 목숨을 거뒀다. 317일 간의 ‘연명’을 마치고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쓰러진 날 이후로 그의 죽음은 의사에 의해 조율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전에 연명치료를 거부했던 고인의 뜻도, 그의 뜻을 존중했던 가족들의 의견도 묵살한 채 병원은 고집스럽게 그를 연명시켰다. 더 이상 채혈이 가능한 정맥이 없을 때까지, 신장, 췌장, 간, 폐 기능이 모두 망가질 때까지, 승압제로 혈압을 유지시키고 인공호흡기의 산소 농도를 100%로 높이면서 그를 억지로 연명시켰다. 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고 이뇨제로도 소변 배출이 안 되는 상태로 그는 죽었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그 날부터 목숨을 거두기 전까지 그의 존엄은 어디 있었는가, 왜 아무도 그의 존엄을 지키지 못했는가 난 묻고 싶다.
고 백남기씨의 317일 간의 연명 기간을 통해 우린 생사여탈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사여탈권은 예로부터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한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셸 푸코는 근대에 와서 이 권력이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317일 간 봐왔던 권력은 바로 이 권력이었다. (물론 고 백남기 씨에겐 두 가지 방식 모두, 곧 죽게 하는 권력이 일차로, 그 다음으로 살게 하는 권력이 작용했다.) 이 살게 하는 권력이 백남기씨를 연명시켰던 방식과 이 사회를 연명해나가는 우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은 없는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대부분 원치 않는 삶을 산다. 의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 말이다. 여기 이곳에서 삶에 대한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주어진 것은 태어났으니 살아내는 것뿐이다. 청년실업률과 비정규직 취업률은 매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가계부채가 공식적으로 1200조원을 넘어섰다. 가구당 평균 부채가 6000만원에 이르고, 20대 평균부채가 1600만원에 육박했다. 청년들은 지금 한국 사회를 지옥불반도, 헬조선, 망한민국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돈 만이 아니다. 올 한해에만 북한은 일곱 차례의 핵·미사일 실험을 강행했으며, 잇따른 지진으로 인해 원전 위험성은 급증했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정책을 펴는 정권에 대한 20대 지지율은 10퍼센트가 채 되지 않고, 급기야는 무속인의 불법한 국정 개입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누가 원했는가 이런 삶을. 우리에게 진정한 주권이 있었다면 결코 이런 삶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이 삶에 존엄이 있는가. 나는 다시 묻는다.
솔직하게, 희망 같은 건 없다고 일찌감치 말하자.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듯 앞으로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기회는 균등하지 않을 것이고 결과도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경쟁은 가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패배할 것이다. N포세대의 N은 무한으로 발산할 것이다. 백남기씨가 그랬듯 우리의 신장과 췌장, 간과 폐와 심장과 온 몸의 기관이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이 삶은 계속 될 것이다. 이 삶에 대체 어떻게 존엄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공감하든, 공감하지 않든 이 삶에 존엄을 회복하는 길, 거창하게 말해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 위에서 실현하는 길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공호흡기를 떼버리고, 승압제의 투여도, 항생제 투여도 거부하고, 삶을 살아내 보는 것. 불가능해보이지만, 이것이 아니고선 이 권력으로부터 존엄을 지킬 길이 없다. 어떻게든 그 세찬 물줄기를 견뎌 서보는 것, 삶이 허용되지 않은 곳에서 삶을 기획해내는 것. 자유라고 일컬어지던 이 불가능성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고 백남기씨 영정 사진의 선한 미소에서 그 불가능성을 잠시나마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임마누엘, 그의 세례명에서 진실을 느끼는 것 또한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희망은 없지만, 삶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불가능의 형태로 말이다. 한 번도 직접보지 못한 임마누엘과 같이 말이다. 농민 백남기의 죽음은 바로 그 불가능을 입증하듯 끝나버렸지만, 그 불가능의 이름은 삶의 가능성으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에 존엄이 있다고 믿는다.